프란체스코 2세 스포르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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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란체스코 2세 스포르차는 루도비코 스포르차와 베아트리체 데스테의 아들로, 밀라노 공국의 공작이었다. 1499년 프랑스의 침공으로 망명 생활을 했으며, 1521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에 의해 밀라노 공작에 임명되었다. 그는 문화와 경제 회복에 힘썼으나, 스페인 군의 영향으로 통치에 제한을 받았다. 코냑 동맹 전쟁에 참여했다가 패배하여 통치권을 상실하기도 했지만, 후에 회복했다. 1534년 덴마크의 크리스티네와 결혼했으나 후사 없이 1535년에 사망했으며, 그의 죽음은 제4차 이탈리아 전쟁의 원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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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르차 가문은 15세기 중반부터 16세기 중반까지 밀라노 공국을 지배한 이탈리아 귀족 가문으로, 용병대장 무치오 스포르차를 시조로 하여 르네상스 문화를 후원하고 유럽 왕족과 혼인 관계를 맺었으나 권력 투쟁과 이탈리아 전쟁으로 몰락했다.
프란체스코 2세 스포르차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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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위 | 밀라노 공작 |
출생 이름 | 스포르차 프란체스코 스포르차 |
출생일 | 1495년 2월 4일 |
출생지 | 밀라노 공국 밀라노 |
사망일 | 1535년 11월 2일 |
사망지 | 밀라노 공국 밀라노 |
배우자 | 크리스티나 아브 단마르크 (1534년 결혼) |
가문 | 스포르차 가문 |
아버지 | 루도비코 스포르차 |
어머니 | 베아트리체 데스테 |
종교 | 로마 가톨릭교회 |
통치 | |
공작 계승 | 밀라노 공작 |
통치 기간 | 1521년 11월 20일 – 1535년 10월 24일 |
이전 통치자 | 프랑수아 1세 |
다음 통치자 | 펠리페 2세 |
2. 어린 시절
프란체스코 2세는 밀라노 공 루도비코 스포르차와 베아트리체 데스테의 차남이다. 이탈리아 전쟁 과정에서 아버지 루도비코가 밀라노에서 추방되자, 루도비코는 프란체스코를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막시밀리안 1세의 궁정으로 데려갔다. 막시밀리안 1세는 프란체스코의 사촌 누이 비안카 마리아 스포르차와 결혼한 사이였다.
1499년, 프란체스코 2세가 4살 되던 해에 프랑스 왕 루이 12세가 밀라노의 계승권을 주장하며 북이탈리아를 침공했다. 루도비코는 두 아들 마시밀리아노와 프란체스코를 막시밀리안 1세의 궁정이 있는 인스부르크(Innsbruck)로 망명 보냈다.[3] 1494년에 루도비코는 자신의 조카 비앙카 마리아(1472-1510)와 막시밀리안 1세의 결혼을 성사시킨 바 있는데, 이때 맺어진 혼인동맹에 따라 자연스럽게 망명이 이루어졌다.
1500년, 아버지 루도비코 스포르차의 근거지인 노바라가 프랑스 군에 포위되었다. 양측 군대에는 모두 스위스 용병이 있었는데, 이들은 동족끼리 싸우는 것을 원치 않아 노바라를 떠났다. 루도비코는 스위스인으로 변장하여 탈출을 시도했으나, 1500년 4월 프랑스 군에 붙잡혔다. 같은 해 10월 6일, 밀라노는 농성 끝에 프랑스 군에 함락되었다. 루도비코는 프랑스 로슈 성에 감금되었다가 1508년에 사망하였다.[1]
2. 1. 출생과 가계
프란체스코 2세는 밀라노 공 루도비코 스포르차와 베아트리체 데스테의 차남이다. 이탈리아 전쟁 과정에서 아버지 루도비코가 밀라노에서 추방되었을 때, 루도비코는 프란체스코를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막시밀리안 1세의 궁정으로 데려갔다. 막시밀리안 1세는 프란체스코의 사촌 누이 비안카 마리아 스포르차와 결혼한 사이였다. 이후 프란체스코는 성직자가 되기로 결정하였다.2. 2. 망명 생활
1499년, 프란체스코 2세가 4살 되던 해에 프랑스 왕 루이 12세가 밀라노의 계승권을 주장하며 북이탈리아를 침공했다. 아버지 루도비코는 두 아들 마시밀리아노와 프란체스코를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막시밀리안 1세의 궁정이 있는 인스부르크(Innsbruck)로 망명 보냈다.[3] 루도비코는 1494년에 자신의 조카 비앙카 마리아(1472-1510)와 막시밀리안 1세의 결혼을 성사시킨 바 있는데, 이때 맺어진 혼인동맹에 따라 자연스럽게 망명이 이루어졌다. (비앙카는 막시밀리안 1세의 두번째 부인이다.)이후 프란체스코는 성직자가 되기로 결심하였다.
2. 3. 부친의 사망
1500년, 아버지 루도비코 스포르차의 근거지인 노바라가 프랑스 군에 포위되었다. 양측 군대에는 모두 스위스 용병이 있었는데, 이들은 동족끼리 싸우는 것을 원치 않아 노바라를 떠났다. 루도비코는 스위스인으로 변장하여 탈출을 시도했으나, 1500년 4월 프랑스 군에 붙잡혔다. 같은 해 10월 6일, 밀라노는 농성 끝에 프랑스 군에 함락되었다. 루도비코는 프랑스 로슈 성에 감금되었다가 1508년에 사망하였다.[1]3. 밀라노 공작
캉브레 동맹 전쟁 중인 1512년 8월, 스위스 용병과 베네치아가 합세하여 밀라노에서 프랑스군을 몰아내고 프란체스코의 형인 마시밀리아노 스포르차를 밀라노 공작으로 추대하였다.[1] 그러나 1515년 프랑수아 1세가 이탈리아를 침공하여 밀라노를 점령하면서 마시밀리아노는 프랑스에 밀라노 공국의 지배권을 포기하고 망명생활을 하였다.[1]
아버지 루도비코 스포르차가 이탈리아 전쟁 과정에서 밀라노에서 추방되었을 때, 프란체스코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막시밀리안 1세의 궁정으로 보내졌고, 성직자가 되기로 결정되었다.[2] 1521년에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가 밀라노를 다시 프랑스로부터 탈환하여 프란체스코는 밀라노 공작이 되었으나, 그의 주권은 밀라노가 스페인군에 의해 점령되었기 때문에 제한되었다.[2]
1521년, 카를 5세는 4차 이탈리아 전쟁 중에 프랑스로부터 밀라노를 탈환한 후 프란체스코를 밀라노 공작에 임명하였다.[4] 20년 만에 밀라노로 돌아온 프란체스코 2세는 문화와 경제 회복에 힘썼다. 1522년에는 비코카 전투에서 황제 편에 서서 싸우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권력은 밀라노에 주둔하고 있는 스페인 군대에 의해 제한되었고,[5] 이에 대해 많은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프란체스코 2세는 스포르차 가문의 밀라노 복귀를 도운 카를 5세를 1526년에 배반하였다. 그는 교황 클레멘스 7세가 주도하고 이탈리아 도시 국가들이 참여한 코냑 동맹에 가입하여 황제 카를 5세에 대적하여 코냑 동맹 전쟁을 일으켰다. 전쟁은 코냑 동맹군의 대패로 이어졌고 스포르체스코 성에 포위당한 후 밀라노에 대한 통치권을 상실하고 말았다. 1529년 종전(終戰)에 따른 평화 협정에서 거액의 배상금()을 물고 나서 밀라노 지배권을 간신히 되찾았다.
3. 1. 즉위 배경
캉브레 동맹 전쟁 중인 1512년 8월, 스위스 용병과 베네치아가 합세하여 밀라노에서 프랑스군을 몰아내고 프란체스코의 형인 마시밀리아노 스포르차를 밀라노 공작으로 추대하였다.[1]1515년 프랑스 루이 12세가 사망한 후 즉위한 프랑수아 1세는 대관식에서 자신이 밀라노 공작임을 선포한 후 9월에 이탈리아를 침공하여, 마리냐노 전투에서 승리하고 10월 4일 밀라노를 점령하였다.[1] 마시밀리아노는 프랑스군에 생포되었고 30,000 두캇에 밀라노의 지배권을 포기한 후, 프랑스에서 망명생활을 하다가 1530년 6월에 사망하였다.[1]
아버지 루도비코가 이탈리아 전쟁 과정에서 밀라노에서 추방되었을 때, 루도비코는 프란체스코를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막시밀리안 1세의 궁정으로 데려갔으며, 막시밀리안 1세는 프란체스코의 사촌 누이 비안카 마리아 스포르차와 결혼했다.[2] 프란체스코는 성직자가 되기로 결정되었다.[2] 아버지 루도비코는 프랑스 왕 루이 12세에 의해 로슈 성에 감금되었고, 1508년에 사망했다.[2] 1521년에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가 밀라노를 다시 프랑스로부터 탈환하여 프란체스코는 밀라노 공이 되었으나, 그의 주권은 밀라노가 스페인군에 의해 점령되었기 때문에 제한된 상태였다.[2]
3. 2. 4차 이탈리아 전쟁과 즉위
1519년 6월, 스페인 국왕 카를 5세가 신성 로마 황제로 선출되자 황제 선거에서 떨어진 프랑수아 1세는 강한 불만을 드러냈다. 합스부르크 가문의 영토인 플랑드르, 독일, 스페인 등으로 인해 프랑스 영토가 둘러싸여 있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발루아 가문과 합스부르크 가문의 관계는 악화되었다. 프랑수아 1세는 카를 5세를 상대로 1521년에 다시 전쟁을 일으켰다.1521년, 카를 5세는 4차 이탈리아 전쟁 중에 프랑스로부터 밀라노를 탈환한 후 프란체스코를 밀라노 공작에 임명하였다.[4] 20년 만에 밀라노로 돌아온 프란체스코 2세는 문화와 경제 회복에 힘썼다. 1522년에는 비코카 전투에서 황제 편에 서서 싸우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권력은 밀라노에 주둔하고 있는 스페인 군대에 의해 제한되었고,[5] 이에 대해 많은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3. 3. 통치와 코냑 동맹 전쟁
프란체스코 2세는 스포르차 가문의 밀라노 복귀를 도운 카를 5세를 1526년에 배반하였다. 그는 교황 클레멘스 7세가 주도하고 이탈리아 도시 국가들이 참여한 코냑 동맹에 가입하여 황제 카를 5세에 대적하여 코냑 동맹 전쟁을 일으켰다. 전쟁은 코냑 동맹군의 대패로 이어졌고 스포르체스코 성에 포위당한 후 밀라노에 대한 통치권을 상실하고 말았다. 1529년 종전(終戰)에 따른 평화 협정에서 거액의 배상금()을 물고 나서 밀라노 지배권을 간신히 되찾았다.1522년, 프란체스코 2세는 비코카 전투에서 황제 측으로 참전했다.[1] 1526년, 프랑수아 1세, 교황 클레멘스 7세 및 피렌체 공화국과 함께 코냑 동맹 전쟁에 참여하여 스포르체스코 성에서 포위되었다.[1] 그는 20년간의 전쟁으로 피폐해진 자신의 공국으로 돌아와 문화적, 경제적 회복을 촉진했다.[1]
4. 결혼과 사망
1534년 5월 4일, 크리스티안 2세와 이사벨 데 아우스트리아의 딸이자 카를 5세의 조카였던 크리스티네와 결혼했다.[6] 그러나 1535년 11월 후계자 없이 사망했다.[7] 그의 사후, 카를 5세는 밀라노를 합스부르크 왕가의 지배하에 두려 하였고, 이에 프랑스가 반발하며 이탈리아 전쟁이 다시 발발했다. 프란체스코 2세의 배다른 형제 조반니 파올로는 잠시 밀라노 공국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했으나, 같은 해에 원인을 알 수 없는 이유로 사망했다.
4. 1. 결혼
1534년 5월 4일, 프란체스코 2세 스포르차는 크리스티안 2세와 이사벨 데 아우스트리아의 딸이자 카를 5세의 조카였던 크리스티네와 결혼했다.[6] 그러나 1535년 11월에 후사 없이 사망했다.[7]4. 2. 사망과 후계 문제
1534년 5월 4일, 프란체스코 2세는 크리스티안 2세와 이사벨 데 아우스트리아의 딸이자 카를 5세의 조카였던 크리스티네와 혼인하였다. 그러나 1535년 11월에 후계자 없이 사망하였다.[6] 같은 해 6월에 시작된 튀니스 원정을 9월에 성공적으로 마무리한 카를 5세는 군대와 함께 나폴리로 입국하여[7] 그곳에서 겨울을 나던 중 프란체스코 2세의 사망 소식을 접했다. 카를 5세는 즉각 측근을 파견하여 밀라노를 접수한 후, 자신의 아들 펠리페 2세에게 밀라노를 물려주려 하였다. 프랑스는 이에 크게 반발하여 1536년 3월에 밀라노를 침공하면서 6차 이탈리아 전쟁(1536-38)이 발발하게 되었다.프란체스코 2세의 배다른 형제인 조반니 파올로는 프란체스코 2세 사망 후 잠시 밀라노 공국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했으나, 같은 해에 원인을 알 수 없는 이유로 사망했다.
5. 가계도
Francesco II Sforzait의 가계도는 다음과 같다.
1세대 | 2세대 | 3세대 | 4세대 |
---|---|---|---|
1. 프란체스코 2세 스포르차 | 2. 루도비코 스포르차 | 4. 프란체스코 1세 스포르차 | 8. 무치오 아텐돌로 스포르차 |
9. 루치아 다 토르시아노 | |||
3. 베아트리체 데스테 | 5. 비안카 마리아 비스콘티 | 10. 필리포 마리아 비스콘티 | |
11. 아녜세 델 마이노 | |||
6. 에르콜레 1세 데스테 | 12. 니콜로 3세 데스테 | ||
13. 리치아르다 디 살루초 | |||
7. 엘레오노르 드 나폴리 | 14. 페르디난도 1세 | ||
15. 이사벨라 드 클레르몽 |
참조
[1]
서적
The Italian Wars: 1494-1559
Pearson Education Limited
2012
[2]
서적
unspecified
[3]
서적
대항해 시대의 탄생
시공사
[4]
서적
The Italian Wars: 1494-1559
Pearson Education Limited
2012
[5]
서적
unspecified
[6]
서적
지중해: 펠리페 2세 시대의 지중해 세계 3
까지글방
[7]
서적
로마, 약탈과 패배로 쓴 역사
도서출판 마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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